독일명작의 이해 과제 #1,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및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 서평입니다. 늘 그렇듯 맥주 마시고 2시간 동안 마구마구 써버린 글이기에 다시 읽자니 굉장히 창피하지만... 일단 포스팅. 붙여넣기 하기 귀찮아서 워드 2007에서 직접 블로그 게시했습니다. 덕분에 레이아웃이 원본과는 약간 다르네요.
수업시대 + 방랑시대 = 초월시대?
2000-11079 통계학과 이상복
수업시대 : 방랑시대 = 개인 : 사회
[빌
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이하 수업시대)와 그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이하 방랑시대)는 한
작가의 작품이면서도 (직접적으로) 연속되지 않으며 통일된 주제의식을 담고 있지도 않다. 두 작품을 한 데 묶어주는 것은 빌헬름
마이스터라는 주인공 한 사람뿐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방랑시대의 주인공이 빌헬름 마이스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즉 임의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크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방랑시대가 함의하고자 하는 사변적 성찰의 폭과 너비는
수업시대를 능가한다고 볼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방랑시대가 수업시대를 포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수업시대가 그리는
것은 개인, 방랑시대가 그리는 것은 사회 혹은 사회와 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근세부터 제기되어 괴테가 살던 시대를 지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질문 한 가지. 개인과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때 양자 중 어떤 것이 우선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유보해도 좋다면, 수업시대와 방랑시대를 한 데 묶어 서평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머리에는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을 법하다. 바로 변증법.
변증법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캐리비안의 해적], [매트릭스] 등의 영화제목을 들으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트릴로지(trilogy) 구성의 영화들이란 점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3이란 수를 좋아했다 했으나 이는 비단 우리 동양인만의
취향은 아니었던 듯싶다. 사실상 헤겔을 훨씬 앞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던 변증법(변증학)은 정(正), 반(反), 합(合) 3개의 명제를 제시한 학문이었다. 여기, 수업시대와 수업시대의 후속편인 방랑시대가 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그 다음 3번째 작품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가?
증거는 없지만(물론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른다), 필시 괴테는 중년에 방랑시대를 집필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트릴로지 구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동시에 "방랑시대는 별로 안 팔려도 괜찮아. 그 다음 3번째 작품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써야지." 따위로 생각했을 것이다(물론 추측이다). 그러나 예상보다 훨씬 늦어져 방랑시대의 집필이
늦어지자 방랑시대 자체의 내용도 초기 의도와는 다분히 변화했을 테고, 말년에서야 탈고가 끝나자 3번째 작품은 시작도 못하게 된
것이다(역시 추측이다). 그렇다면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트릴로지의 대미를 장식할, 변증법의 최종결과인 합명제에 해당할, 그의
만년 역작으로 길이 남았을지도 모를, 마지막 3번째 작품은 과연 어떤 작품이었을까?
수업시대, 연애소설
합명제를 그려보기 위해 정명제에 해당하는 수업시대부터 살펴보자(그리고 원래 서평을 쓰는 게 과제이기도 하고).
수업시대라는 한 작품만을 고려할 때와는 달리 후속편의 존재를 염두에 둔다면 수업시대는 명백하게 개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즉 이러한 인식의 틀 안에서는, 실제로는 다분히 사변적이고 샛길로 빠지기도 잘 하는 수업시대라는 한 소설은
빌헬름 마이스터라는 한 인물의 성장소설로 제한되어버린다.
수업시대의 주인공인 빌헬름 마이스터라는 인물은 전형적으로 올곧은 근세 소설적 인물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나름 '쿨'한 면모를 보이며 여러 여성 인물들 사이를 배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강의시간을 통해 토론된 바,
이것이 작가 괴테 자신의 생활상 혹은 그의 판타지를 투영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당시로서 그 정도로 뻔뻔한 소설가가
없었음을 떠올린다면 수업시대를 (시기적으로 앞서는) 로맨스 소설이나 단순한 연애소설로 평가하는 행위는 부적절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를 살아가는 어느 독자가 '그런 것 따위 알게 뭐야'라고 말하는 순간, 수업시대는 다시 연애소설로 돌아오는데
사실 이게 또 작품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음은 아님을 지적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연애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까지도
하고 싶다.
만약 수업시대를 연애소설로 치부한 뒤에 작품을 꿰뚫는 축으로 여성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마리아네를 제외하면) 필리네와 미뇽이다. 마리아네 한 명에게 바쳐진 제1부가 지나간 뒤 제2부 초반에 등장하는
이 두 여인은 이후 작품이 끝날 때까지 빌헬름 곁에서 그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친다. 특히 필리네 특유의 무신경함과 뻔뻔함,
그리고 생기와 활력은 어쩌면 스테레오타입으로 자리잡았는지,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전해져 온다. 그런 필리네는 (나름)
빌헬름을 연모하지만 우유부단한 빌헬름은 필리네의 매력을 받아들일 줄 모르고, 이에 독자(사실 필자)는 분개한다.
한편 미뇽은 플러스(+)적인 필리네와는 달리 마이너스(-)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필리네와는 약간
다른 의미로 이성 대 광기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볼 때 광기에 발을 담그고 있다. 하프 연주자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빌헬름은
이처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들게 하는 미뇽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혹은 많은 사고를 하게 된다. 미뇽이나
하프 연주자 같은 '예술가'적인 인물들은 수업시대의 부제에도 포함되는 '연극'이라는 키워드와도 연결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괴테
자신의 '연극을 통한 대중의 교화'라는 다분히 계몽주의적 사상이 반영된 게 아닐까 등으로 강의 중에 토론한 바 있으므로 논외로
하겠다.
한편 미뇽과 빌헬름과의 정사 가능성이 언급되는 등, 로리타 콤플렉스를 의심할 여지가 생기기도
하지만 이 역시 현대 독자의 관점하에서의 해석이므로 사실무근으로 봐야 옳을 듯하다. 물론 미뇽은 매력적이다. 그런데도 괴테는
미뇽을 죽인다. 제8부 제9장에서는 미뇽과 하프 연주자에 얽힌 근친상간이라는 키워드도 등장하는데 괴테는 이들, 이른바 '광기'의
세계에 속한 인물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감으로써 중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상 언급한 필리네와 미뇽뿐 아니라 다수의 인물들이 등장하며 모종의 연애사가 전개되고, 이를
통해 빌헬름이라는 개인은 성장한다. 연애소설과 성장소설은 사실상 궤를 같이한다. 적어도 남성 작가가 쓴 남성이 주인공인 소설은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수업시대는 동시에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 하나는, 제7부 제9장에서 빌헬름이
'로타리오의 수업시대' 등과 그 자신의 수업시대라고 적힌 두루마기들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이 하나의 장면만큼이나 이 작품이
성장소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방랑시대, 사회소설
수업시대를 읽고 방랑시대를 읽기 시작한 독자는 으레 생각한다. '한층 더 재미없어졌고 한층 더 안 읽히는군.'
방랑시대에는 유기적인 이야기(플롯) 전개가 부재한다. 게다가 중간중간 잠언집은 물론 운문들까지 무시할 수 없는 분량으로
등장하며, 이어지지 않는 짧은 이야기(노벨레)들이 삽입된다. 이에 대해 소설의 형식적 실험(혁신)이라고 평할 수 있을지 여부는
논외로 하겠으나, 분명 방랑시대는 쉽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다.
게다가 수업시대와는 달리 매력적인 인물들(가령 필리네와 같은)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방랑시대가
초반에 노정하는 주제는 '미국이라는 신세계로의 이민'이다. 그러니 재미없을 수밖에. 오늘날은 소위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가 밝혀진
지도 한참 지난 시대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괴테 혹은 빌헬름을 비롯한 '탑의 결사' 내지 '체념자의 결사'는 미국을 신세계라
주장하며 신세계로의 이민뿐 아니라 구세계 안에서의 개혁도 꿈꾼다. 이 개혁은 급진적인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온건한, 게다가
'위(上)로부터의 개혁'이다. 방랑시대는 이러한 메시지들로
가득 차있다. 학문, 종교, 교육, 예술, 산업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괴테 자신의 사상들로 말이다. 방랑시대가 수업시대보다 더
재미없는 이유는 비단 이야기가 부재하기 때문도, 형식적 실험이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만도 아니다. 바로 현대의 독자가 보기에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점 때문이다.
이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고 읽을 때, 괴테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중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체념'이다. 흔히들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체념을 괴테는 괴상하게도 긍정적인 개념으로 재창조했으나 사실 방랑시대 한 권의
소설만으로는 그 체념의 미학에 선뜻 수긍하기가 힘들다. 사실 이 체념이라는 개념은 방랑시대를 아무리 읽어봐도 전혀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체념 혹은 체념자라는 단어들이 간혹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수다스러운(적어도 강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리라 믿는다) 괴테가 이상하게도 체념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에 한해서는 부연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막연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체념이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무언가'라는 정도. 따라서 이것이 방랑시대의 초-개인적인 주제의식과 연관이
있다는 정도랄까. 마지막 토론을 통해 이 체념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정리되길 개인적으로도 바란다.
이상 언급한 바 방랑시대는 개인을 넘어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를 조망하고 나아가 개인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등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거시적으로 볼 때 수업시대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관점이다. 그럼에도 냉철한
시대의식 혹은 문제의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방랑시대를 사회소설이라고 부르기 망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괴테가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에 영향을 받았고 후에 낭만주의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어쩌면 독일 소설이 흔히들 사변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 또한 논외로 하자.
방랑시대는 분명 원자적 개인을 넘어서고자 한 소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방랑시대는 사회소설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 머물러있던 수업시대의 반명제로 볼 수도 있겠다.
초월시대, 총체소설 혹은 초월소설?
그렇다면 괴테가 최종적으로 그리고자 했던 마지막 3번째 작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여기까지 수업시대와 방랑시대를 마음대로 살펴본
이상, 3번째 작품 역시 마음대로 그려보는 일 또한 그리 어렵진 않을 듯하다. 개인과 사회를 대립하는 관계로 볼 때, 그것들이
통합된 지점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확히 말하면 개인과 사회가 종합통일된 상태, 즉 양기(Aufheben)된 상태는 무엇일까?
방랑시대에서 마카리에라는 인물은 초월적인 이상 혹은 절대 선(善) 혹은 이데아(Idea)와 같은 존재로 묘사되었다. 마카리에는 분명 개인적 차원으로서의 인간을 넘어 우주와 소통하는, 어떻게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신격 존재였다. 이러한 신격 존재와 같은 인간들이 널리 실재(實在)하고 그들이 서로 이어지고 소통하는 그물망(network)으로서의 사회를 상상해보면 어떨까?
그것이 어떤 양상을 띠게 될지와 별개로 그것을 소설로써 표현할 수 있을지 여부는 정말로 심각한
의문에 부딪힌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괴테는 분명 그러한 소설을 쓰고 싶어했으리라 본다. 소위 형식적으로 총체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소설 이상의 총체소설이랄까. 즉 개인과 사회의 이상적인 통합상의 제시와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충분한 묘사들로 이루어진
소설, 나아가 모든 철학적 사상들, 종교적 믿음들, 초월적인 관념들을 통합해 하나의 소설로 쓸 수 있다면? 괴테가 막연하게나마,
극히 막연하게나마 생각했을 법한 제3의 소설은 아마도 그러한 것이었으리라. 여기, 지금까지 써내려간 이 표현만큼이나 붙잡을 수
없을 법하고 불가능하리라 여겨지는, 따라서 소설이면서도 소설을 초월하는(방랑시대의 형식적 실험을 인정하고, 그것이 괴테에게 있어
작가로서의 진일보라고 인정한다면), 아니 소설뿐 아니라 당시까지의 모든 예술양식을 뛰어넘는 그런 소설 말이다.
물론 그런 소설은 쓰여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아마 없을 듯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