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독일명작의 이해 과제 #2, 카프카의 [아메리카] 서평입니다. 역시나 맥주 마시고 쓴 글인데; 지금 읽어보니 논지나 문장이 참 안 좋습니다-_-;; 맞춤법 틀린 부분도 있길래 몇 개 고쳤습니다; 분명, 잘 쓴 글은 아닙니다. 스스로 인정. 워드에서 붙여넣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종되었다
2000-11079 통계학과 이상복


실종자
[아메리카]는 ‘Der Verschollene’ 또는 영제 ‘The man who
disappeared’로도 알려져 있다. 한글로는 ‘실종자’로 번역되는데, 간단명료하면서도 주제를 잘 함축하는 번역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잠깐만. 주인공 칼은 정말로 실종되는 게 맞나? 실종의 사전적 정의는 ‘종적을 잃어서 간 곳이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됨’인데, 과연 소설에서 칼은 종적을 잃고 생사를 알 수
없게 되는가? 아베 코보(安部公房)의 [모래의 여자]에서와 같이, 주인공은 명시적으로,
법적으로 실종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가 되겠다.
실존주의
카뮈의 소설을 실존주의와 얽는 해석에 대해
카뮈 본인은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카프카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카프카의 소설
역시 실존주의를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한다(특히 [변신]). 이들 소설 속에서 부조리한 현실에 내던져진 주인공들은 ‘절망’(키에르케고르)하고, ‘자살’(카뮈)을 꿈꾸기도 한다. [아메리카]로 돌아오면, 사실 칼은 그리 크게 절망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는 실로, 말도 안 될 정도로,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 칼의 상황은 적어도 하루아침에 벌레가 된
것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칼은 결코 자살을 택할 인물은 아니다. 삶에 절망하지만 자살할 생각은 없고, 오히려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한다. 아마 여기에 이미 정답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카프카는 그런
그를 실종시키고자 한다. 칼 자신이 아무리 실종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소설 제목이 ‘실종자’이고 소설 주인공은 칼인데
어쩌란 말인가.
아메리카
괴테를 즐겨 읽었다는 카프카는 당연히 괴테가
그리던 미국상을 접했을 테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미국을 재인식했을 터이다. 그러나 괴테가 이상향으로 바라보던 미국은, 카프카의 시대에 오면서
이상향으로서의 달콤함은 퇴색되고 오히려 산업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 소외 등의 부정적 측면들이 부각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카프카가 주로 다룬 소재들인 인간 소외, 의사소통의 부재, 권위적(가부장적) 억압
등은 모두 20세기의 시대상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이게
사실 참 편리한 해석 방법이다).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는 더 이상 산업, 과학, 기술의 진보가 절대선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당대 지식인들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같은 맥락에 노정할 수 있을 듯싶다.
물론 [아메리카]의 배경이 반드시 미국이어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은 유효하다. [아메리카]의 미국은 흔히들 말하는 메타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메타포는 그야말로 편리하다. 누구 하나 실종돼도 이상할
것 없는 곳, 그곳이 미국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카프카는
미국을 배경으로 선택하고 (비록 현지 답사까지는 하지 않았다 해도) 미국에
대한 고증에 많은 노력과 분량을 할애했다고 볼 수 있다.
비극적인 혹은 덜 비극적인
자, 실종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과 배경 속에, 실종되고 싶어하지 않는 칼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과연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는가? 혹은 열심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가? 굳이 [아메리카]가 미완이라는 전제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적어도 현존하는 [아메리카]의 텍스트 하에서는 모든 해석, 즉 정반대의 해석들마저 가능해진다.
먼저 비극적인 해석. 칼은 드라마르샤 패거리에 의해 뼛속까지 착취당하다가 소리소문 없이 세상을 사직하고, 애초에 존재하기라도 했냐는 듯이 보기 좋게 잊혀질 것이다. 매우
비관적인 관점이지만, 칼이 소설 내내 현실에 시달리기만 한다는 점에서 그리 큰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해석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클라호마 극장 에피소드 전체가 빈사 상태에 빠진 칼이 떠올리는
환각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지만, 사실 이는 너무 안이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칼이 자신의 이름을 ‘니그로’라고
대답하는 부분 등에서 ‘환각치곤 아직도 너무 리얼하다’라는
비판도 피할 수 없다. 물론 ‘니그로’의 어의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비판을 피하려 한다면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삶의 마지막 환각이라면 좀더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여주지 않겠냔 말이다. 만약 마지막 에피소드가 환각이
아니라고 양보한다면, 이를 칼이 직면하게 될 더 커다란 착취의 서곡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드라마르샤라는 한 개인이 아닌 훨씬 커다란 기업에 의한 착취 말이다. 이는
오클라호마 극장이 옥시덴탈 호텔을 능가하는 거대 기업이라는 가정하에서의 이야기지만, 작중 묘사로 볼
때 이 가정을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한 듯하다.
여기서 기업 또한 어의상 법인(法人)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비교적 초기작인 [아메리카] 이후
카프카가 쓴 [성] 등의 작품에서는 개인 대 권력 구도의
권력항으로서 기업을 초월하는 것들이 등장한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
다음으로,
덜 비극적인 해석. 칼이 어찌어찌 해서 드라마르샤로부터 탈출한 뒤에 ‘옆집 사는 고시생 이미지의 젊은이’처럼 삶에 찌들지언정 자립해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어떨까. 확실히 칼의 작중 성격에 비춰보면 이쪽이 그럴싸해 보인다. 칼은 아무리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 앞에서도 현실 도피에 빠지지 않고, 비록
도망을 선택할지언정 상황을 타파해보려고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독자가 보기에 그 상황들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칼이기에 독자는 칼에게 일말의 희망이나마
걸어볼 수 있고, 그가 드라마르샤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상황도 충분히 그려 봄직하다. 그러다 보면 오클라호마 극장까지 찾아가게 되는 상황도 가능할 테고, 그가
자신의 이름을 ‘니그로’라고 일컫는 것을 자기 비하가 아닌
겸손함의 표출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설 말미의 골짜기 그리고 비말(飛沫)의 이미지도 뭔가 희망적인 이미지로 다가오게 된다. 비록 짧은 분량이나마 소설 구성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러한
자연, 그리고 물의 이미지는 분명 새로운 국면을 암시하는 장치로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설 전반에 걸쳐 배경을 이루는 삭막한 도시 그리고 기계 문명과 대비되어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를 생(生)에의 부정 대 긍정의 명확한 이분법적 구도로 바라보지
않고 ‘비극적인’ 대 ‘덜
비극적인’으로 모호하게 구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후자의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부합한다 한들 그것이 그다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옆집의 고시생 젊은이의
삶이 정말로 희망차고 긍정으로 넘쳐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흔히들 니체의 사상을 실존주의로 보지 않고
생철학(Lebensphilosophie)으로 보는 관점에서 이 논의를 진전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는 논외로
하자). 칼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설 전반에 걸쳐 그가 내던져져
겪는 일들 속에서 그 자신이 모종의 각성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소설의 결말을 긍정으로 읽을 때에서야 비로소 피투성(Geworfenheit) 너머 기투성(Entwurf)이 암시되기는 하지만 이는 너무나 미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실종, 결론은…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칼이 실종됨에는 변함이 없다. 소설은 끝나버리고, 독자는 칼의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따라서 생사도. 다만 관점에 따라 실종의 성격이 달라질 뿐이다.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착취당하는 삶으로의 실종이냐 혹은 미약하게나마 제시된 삶에의 긍정을 붙잡은 실종이냐의 차이이다. 물론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그러니까 칼이라는 인물의 실종이라는
사건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처음의 결론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카프카가 의도한 칼의 실종이 어떤 실종이었느냐,라는 점이다.
작가도 한 사람의 인간이다. 허무주의에 도취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런 인간이 쓸 만한 이야기란
뻔한 주제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삶이란 이러저러하게 거시기 부조리하지만,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조금은 있지 않겠소이까?” 정도. [아메리카]는 정말로 딱 그 정도의 읊조림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피투성이니 기투성이니 거창한 이야기들은 차치해도 상관없다. 칼이
직면하는 상황들은 21세기의 독자가 보기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조리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음직한
이야기 또한 아님이 사실이다. 그리고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칼은 살아간다. 소설 말미에 물의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았다손 쳐도 칼은 살아갔을 것이다. 살아가지 않을 용기가 있다면 – 그것을 용기라고 부를 수 있기나
하다면 – 어느 누구도 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테고 카프카는 굳이 칼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칼은 실종되었다. 실종되었기에 그의 종적은 묘연해졌으나 한가지 확신은 남는다. 그는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으리라고. 바로 지금의 우리가
그러하듯.